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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성 회고록

새마을운동의 요람이자 발상지인 문성마을 성공사례 회고록

2007년 1월 20일

정환성 전 영일군 모천읍장

전 경북매일 부사장


새마을 시작의 소리

새마을 소리만 들어도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30여년 공직 생활 중 새마을 사업과 인연을 맺어 공부를 수행해온 세월이 제일 즐겁고 보람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일군청에 근무하던 1963년은 5.16혁명으로 혼란에서 안정으로 1970년은 지금부터 36년 전 문성동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시기였으며, 늦게나마 포항시에서 잊혀지고 있는 새마을 역사를 재조명하고 자료를 보존할 새마을 기념관을 건립한다니 천만다행이다 싶다.

당시 일들을 주마등처럼 떠홀리며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 회고록을 기술하자니 쫄필도 두렵고 잘못 쓰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1962년 나는 5.16혁명정부가 추진하던 조국근대화의 기치에 동참하여 당시 박경원 지사님의 후원으로 재건국민운동 경북도지부 지도요원 (순회 강사) 자격으로 도내일원에 계몽강연과 농촌실정을 체험한 경험을 토대로 1963년 영일군청에 근무하게 되어 1970년 가를 정부시책으로 추진한 335째 마을 가꾸기 사업 실무를 맡아 과거농촌계몽의 산 경험을 토대로 『새마을 지도자 발굴 양성, 마을의 숙원사업 계획수립, 마을자체 사업과 지원사업으로 구분실시, 새마을 운동 분위기조성, 공무원 지도 담당부락 선정』 등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새마을운동 발상지의 역사적 배경

70년대 정부의 지시로 새마을이 시작되어 기계면 이석걸외 여러명의 지도자들을 발굴 양성하고 대곡리를 시범부락으로 선택하여 여러차례 마을 주민을 설득하였으나 주민들의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여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원활하게 추진하지 못하여 기계면 문성동을 다시 시범부락으로 선정하였다.

문성동은 5.16혁명 후 홍선표라는 젊은 이장을 선출하여 마을 자체적으로 함께 잘살기 운동을 펼치고 67년 극심한 한해 때 주민공동으로 마을 앞 하천에 집수암거를 개발하고 30마력의 양수기를 공동구매 공중 양수로 천수답을 수리 안전답으로 만들고, 주민협동으로 마을길을 고치고, 소득증대를 위한 상정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찍이 1967년부터 양수장 개설로 인한 수리 안전 사업, 천수답 상전화 잠업 사업, 양계 사업 등의 우수 사례를 바탕으로 1970년도부터 시작한 시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대통령께서 1971년 9월 17일 정부각료, 전국 시·도지사, 시장·군수를 대동하여 문성동을 방문한 자리에서 시장·군수는 현지에 돌아가서 문성동 부락과 같이 지도하고 실천하며 “새마을 정신 즉 자조, 자립, 협동하는 정신 주입에 점화 역할을 하고 문성동과 같은 새마을을 만들어라" 고 지시하였으므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지도자 발굴 양성

1970년 여름 경상북도에서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읍·면지도자 1명씩 발굴하여 선진지 경북 포항군 신도마을과 충남 논산면 모야 마들을 견학하고 돌아온 영일군 기계면 이석걸씨는 감명을 받고 기계면 36개 마을에서 145명의 예비지도자를 모집하고 설득한 끝에 1인당 2,500원의 자비를 염출하여 여행 경비를 조달하여 버스 3대를 동원, 자기가 갔던 선진지를 돌아보고 귀향하는 버스에서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잠자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힘을 모아 잘 살아보자고 수차례 모임을 갖고 "앞장서자", "의존하지 말자", "놀음하지 말고 놀지 말자" 이 세가지를 마을 지표로 삼아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였다. 그후 영일군에서는 새마을 지도자 발굴 양성을 위하여 1970년 가를 해병1사단 급수부 관리대 군용 막사를 빌려서 마을당 1명씩 355명의 예비 새마을지도자를 1박 2일간 건강체조, 정신교육, 실무교육 등을 집중교육하고 식사는 자원봉사 부녀회원들의 협조를 얻어 4기에 걸쳐 합숙 교육을 마쳤다. 「한번 해보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부락에 돌아간 교육이수자들이 마을 주민들을 재교육하고 사업 지침을 전파하여 각자 부락의 우선 사업을 선정 토론을 거쳐 → 면사무소에 보고(사업성공 가능성검토) → 군청에 보고 → 군청 자재 기술 인력가능여부를 심사 확정 → 다시 부락에 시달된 마을 사업계획을 반상회를 통해 전 이동주민에게 이해와 협조를 얻어 농한기인 10월말부터 이듬해 5월말까지 완료토록 하였다.

눈물겨운 새마을 가꾸기 운동 추진

이석걸 자원지도자는 자기 집에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를 설치하고 새마을 사업의 애로와 문제점을 해결하며 토지측량, 지붕개량기술자 알선, 스레트, 리어카 공동구매, 시멘트 블록 거푸집 제작 및 지방 유지들에게 호소하여 성금을 모금해서 마을에 지원하고 순회 방문하여 주민들을 격려함으로 새마을 운동을 확산시키고 부인이 제공한 오토바이를 몰고 밤낮없이 활동하다가 사고로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눈물겨운 활동상이 후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자조마을 문성동」이라는 계몽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여 문성동의 발전상을 홍보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문성마을은 1970, 11. 24 새벽 800m의 마을 진입로 (사람들은 문성동 고속도로라 불렀다.) 확장사업을 시작으로 영일군 전체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부락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되고 너도나도 다투어 신바람나게 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문성동민들의 눈부신 활동상이 신문에 나고 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자 경북지사(김덕엽)는 2군사령관 유관기관장을 대동하고 수차례 방문하여 사업현장에서 주민들과 지도자를 위로 격려하자 소문을 듣고 이웃 시·군에서 견학 팀이 줄을 잇고 찾아와 문성동 담당공무원인 필자는 군청 출근을 포기하고 문성동에 출근하여 견학 팀에 대한 사업설명과 마을 소개를 하게 되어 공직자로써 큰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1970. 12. 23 추운겨울날씨에도 도내 읍·면장 전원이 문성동을 시찰하고 현지회의를 통해 새마을사업의 애로사항과 문제점을 해결하기도 했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주로 양회를 소모하는 사업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월동기 사업추진이 어려운 대신 농민를을 농한기에 농로확장 소하천정비 등 토공사업과 돌 줍기 모래자갈채취가 보통일이 아니므로 매일같이 조를 짜서 공사현장에 인원을 동원하고 골재를 운반해야하므로 주민들은 피로에 지치고 배가 고프고 손이 부르트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되기도 했다.

한편 부녀회에서는 음료수, 점심, 간식, 막걸리 등을 장만하고 관내 유관기관 단체 유지들은 순번제로 부락을 방문하여 새마을 사업장의 주민들을 위로 격려하는 등 아름다운 상부상조의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우리 역사상 5천년의 묶은 사고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 고정관념과 체념에서 벗어나 이렇게 새마을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 문성 마을 여건

문성마을의 여건은 지형적으로 기계천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부락으로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생활이 어려워 이동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활이 어렵기는 매한가지고 씨족 간에 시기와 질투가 심하고 낭비와 술과 도박을 일삼는 형편이었다. 이와 같은 저소득 낙후부락이 5. 16혁명 직후 홍선표라는 젊은 동장을 선출하여 힘을 합쳐 잘 살아보자며 양계와 누에치기 등으로 소득증대에 힘써오던 중 1967년도에 극심한 한해로 주민이 하나, 둘씩 대도시로 이농을 하고 젊은이들은 머슴살이를 해야 겨우 살아가는 딱한 실정이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 추진실적

격년제로 다가모는 한해로 가난의 악순환이 계속되자 이 마을 동장인 홍선표와 홍순락(민선 면장)씨 등이 주동이 되어 우리가 살길은 기계천 지하수를 개발하여 마을 농경지까지 양수하는데 있다고 판단하여 부락민회의를 수차례 열고 설득하여 1967년 1단계 양수장(30마력) 설치공사로 16ha의 수리 안전답화에 성공하며, 소득이 늘어나자 1970년에는 제2단계 (100마력) 양수시설을 증설하며 송수관 600m를 지하에 매설하며 30ha의 논를 수리 안전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주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었다.

농업용수공급이 불가능한 천수답 12ha를 상전으로 과감히 조성하여 9만주의 상묘를 식재함으로 1970년도 270 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1973년에 540만원의 소득을 기하였으며 군청에서 12ha 천수답상전 조성 시범지구로 지정하여 원잠종회사(경주소재)와 원잠종 공급계약을 체결하여 항구적인 소득원을 개발할 수 있었다.

1967년 3호 농가가 300수의 양계사업을 시작 후 사료의 공동구매, 계란, 육계의 공동판매, 공동방역 등 협동사업으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게이지식」 축사개축과 사료와 급수의 자동화 등 시설현대화로 인건비를 절감하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수리안전답 덕분에 쌀 40톤에서 110톤을 생산, 천수답 상전 조성으로 양잠 5.4톤 생산, 양계 6, 500 수사육, 소득과 양송이 재배사에 취업 등으로 노임소득를 높이고 지붕개량으로 남은 짚를 양송미공장에 퇴비로 판돈으로 농외소득이 늘어났으며 홀치기, 맥간 등으로 1967년 전국 도 평균소득 15만원에 미달했으나 1970년도 23만원으로 230% 소득증대를 가져옴으로써 주민들은 희망을 가지고 온 마을이 지도자의 뜻에 따라 생각을 진취적으로 바꾸어 부지런히 노력하면 잘 살수 있다는 경험과 자신감이 원동력이 되어 앞서가는 농촌기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5월 농한기에 실시한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있어서 문성마을이 영일군에서 선도 마을로 앞장서 성공했 때문에 영일군 전체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문성동은 타 부락에 앞서 기계천에서 마을만까지 논두렁 좁은 길을 없애고 주민들의 논밭 귀중한 땅을 전부 희사받마 진입도로 폭 5m 길이 800m를 직선으로 개설하고 국도에서 하천까지 1,000m를 확장하였으며 도로 편입 토지 740평 이 문제가 되었으나 부락 유지 홍순락씨 소유 문전옥답 200평을 자진 회사함을 계기로 동민들이 자진 협조하여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주민의 노력은 그칠 줄 모르고 도로 성토 작업에는 지게 대신 리어카가 큰 몫을 차지했고 진입로 따라 측구도 석축으로 마감하여 홍수 시 빗물과 생활용수가 기계천으로 쉽게 유입될 수 있게 되어 수해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기계천 지하수가 문성동민의 젖줄이라면 이 마을 진입로는 사료, 비료, 퇴비, 양곡, 농자재의 운송과 자동차, 리어카, 트럭의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60ha의 전답에도 1,600미터의 농로 개설로 농작물 운송이 원활하게 되어 편리한 영농이 가능해 졌다. 부락일주도로는 토담을 헐고 블록 담장으로 개체한 가운데 도로 폭이 자연 넓어져 리어카가 집집마다 운행할 수 있었고 일주도로 개통 시 농악대를 앞세워 감격에 젖든 촌로들의 밝은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지붕개량 총 동수 151 동중 116동를 6개월 만에 개량완료하고 12동의 스레이트 지붕을 청색, 녹색, 모렌지색으로 도색하여 아름다운 풍치를 연출하였고 리어카 46대 구입 보급함으로 생활의 불편을 감소시켰다. 마을회관을 건립하여 주민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3개소 공동우물을 정비하여 위생수를 공급하고 위생적인 부엌개량사업과 절미저축운동 전개, 공동빨래터 2개소, 변소개량 42개소 정비하고 그 외 마을문고를 개설하며 독서를 권장하고 문맹 퇴치 운동도 전개하였다.

4-H 부원들은 진입로 1,800m 양편에 코스모스 가꾸기 운동을 전개하여 외지에서 견학모는 손님들에게 환경개선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농한기 6개월 동안 문성동에서 자조, 협동으로 일한 새마을 실적을 보면 정부지원 양회 335대와 철근 1톤 약 96,400원과 자재운반비 12,800원 합계 109,200원을 지원받아 마을 진입로외 8개 사업을 480만원(지원대비 약 50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함으로 잠재된 주민들의 의욕과 협동심에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에게 보고

1971년도 새마을 가꾸기 사업 1차년도를 마친 7월 초 중앙부처 합동 심사반 경제기획원 오경세 사무관 일행이 문성동을 현지답사 확인하고 6개월간에 추진한 마을 환경개선사업과 마을 진입도로 지붕개량사업과 주민들의 활기찬 모습에 감동하여 지금까지 심사한 전국의 여러 우수 마을보다 문성동이야 말로 최고라고 관계인과 주민들을 격려하고 상경하여 경제동향보고토록 조치하였다.

1971. 8. 5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실시한 경제동향 보고시 문성동 사례를 대통령 각하, 김종필 총리, 서일교 총무처장관, 주원 건교부장관, 김보현 농림부장관, 농협중앙회장, 국회의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준부 영일군수의 45분간 설명과 슬라이드 상영(문성동 지도공무원 정환성)으로 보고 하였으며 새마을 발상지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당시 녹음테이프는 경상북도 새마을과 신상철씨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고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대통령께서 노고를 치하하며 훈장수여 지시로 대통령상패와 표창장 - 문성동 1971. 7. 30 (제 37773호), 대통령 근정 포장 - 기계면장 김두락, 녹조근정훈장 영일군수박준무, 대통령 국민포장 - 이석걸, 홍선표에게 수여하였으며 그 후 필자는 새마을 유공으로 녹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문성동 성공사례 슬라이드 보고 후 대통령 각하 훈시요지
  • 영일군수와 실무자 노고 치하
  • 마을 실정에 맞는 사업선정 -성공의 관건이다.
  • 사업구분 참 잘 되었다( 주민 사업, 군 지원사업)
  • 한호 목장실패 사례 (초지 조성 100년 소요된다)
  • 각하 초등학교시절 홍수 시 외나무다리 유실 사례회상
  • 발상의 전환필요 교량가설 6개월간 250개 이상실적 고평가
  • 문공부 문성동의 성공사례 영화제작 전국배포 홍보지시
  • 문성동 성공요인은 군수의 계획, 담당공무원 주재, 주민설득과 문제점 해결하는 지도자의 활약과 소득 증대에 있었다.
  • 지붕개량사업과 리어카보급은 우수사업이다.
  • 새마을 정신은 자조· 자주 협동정신이다.
  • 새마을 교육 강화로 이러한 새마을운동을 전국확산 시켜라.
  • 문성동 성공사례는 영일군수와 공무원 주민 특히 지도자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이룩한 위대한 사업이며 내가 생각한 새마을운동이 바로 이런 것이다. 빠른 시일내 내가 직접 문성동를 방문 지사, 시장·군수, 구청장 회의를 현지에서 열겠다고 말씀하시고 1971년 9월 17일 경북도청에서 모전회의 후 모후에 문성동 도착 현지 견학(2시간)을 마치고 대통령께서 문성동 전기사업 조속시행과 문성교 교량사업추진 을 구자춘 경북지사와 군수에게 지시하여 연내에 문성동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볼 수 있었고 문성교는 1972년에 주민들의 피땀 노력 끝에 완공하였다.
잊지 못할 새마을운동 발상지 문성동을 생각하며...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건국이후 유일무일하게 정부 각료,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경찰서장까지 문성동에 오게 하여 새마을운동 현장을 직접 소개하시면서 여러분도 임지에 돌아가서 문성동과 같은 선진 새마을을 만드는 것이 조국 근대화의 지름길이라고 거듭 당부하신 걸 보면 발상지는 문성동이 틀림없다.

1971년 1차년도 새마을 사업이 완료되고 이 성공사례의 파급효과는 새마을금고, 새마을문고, 직 공장새마을운동, 중앙새마을운동본부(민간단체) 설치, 새마을연수원 교육강화 등으로 조직의 단합과 긍정적인 사고로 하면 된다는 자신감 등으로 사회통합의 단초가 될 수 있었다.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새마을운동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사회화합운동이고 국민운동이고 조국근대화운동 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인들의 배타적인 사고로 꼭 계승 발전되어야 할 새마을 지도자단체를 관변단체라는 이름으로 그 기능을 축소하며 명맥만 살아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때 신명을 바쳐 일선에서 열심히 일해 국가발전과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공직자로써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후일 역사학자들이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평가할지 매우 궁금해하며 새마을운동 발상지 재조명을 위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고하신 박승호 시장님이하 관계공무원과 장세헌 도의원, 최영만, 이상범 시의원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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